살기 어렵고, 일할 곳 없어 떠난 고향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자녀들, 타인을 배려하고 남을 도우려는 노력 항시 했으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살기도 어렵고 일할 곳도 없어서 막막한 시절이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정의 행복을 위해 뭔가 결심을 해야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해외근로자(리비아·사우디)였다. 자식과 가정을 위해서 남자는 불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다. 해외근로자로 일했을 당시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현장 소장에게 부탁하여 밤낮없이 일에 매진했다. 돈도 따블로 준다”
구림면 방화리 고향에서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는 정병홍(79) 씨가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털어놓은 말들이다.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자신의 어려움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평을 듣고 있는 정 씨는 다른 마을을 다녀보면 마을 어귀나 마을 앞에 이곳이 ‘어디 마을이다’는 표지석이 대부분 있는데, 본인 마을에는 이도 저도 없고 해서 지난 2015년 1월 동생 정병현 씨와 함께 사비를 들여 표지석을 세웠단다.
또, 그 이전인 지난 2011년에는 마을회관에 노래방 기계를 기증하여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나 어르신들이 함께 음악도 듣고, 때론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할 수 있도록 했단다.
지난해 12월에는 “마을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그리고 마을 행사 시 필요할 때 유용하게 써 달라”며 500만원의 성금을 마을에 기탁 했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나, 마음먹은 선한 행동을 실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현실이다.
특히,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소상공인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병홍·권춘자 씨 부부는 자신들은 비우고, 마을공동체에 필요한 것들은 하나하나 채워주며, 참 행복의 의미를 찾은 듯 보였다.
 




정 씨 부부의 선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을 입구 도로가 좁아 마을 주민들과 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의 불편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사유지를 마을에 희사해 통행의 불편함을 해결해 줬다”는 마을 주민의 귀띔이다.
“외국에서 노동자로 일할 때 가족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자식들도 보고 싶었으나 특히, 말없이 고생하는 마누라(아내)가 항시 보고 싶었다”며 “나 건강하고 자녀들 잘됐으니, 나름 삶에 보람을 느끼지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내가 몸이 안 좋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밝힌 정 씨 부부는 3남 1녀 자녀들을 모두 공부시키고, 분가 시킨 후 지난 2001년 초에 고향마을인 구림면 방화리마을로 낙향했다.
“하루 담배 2갑 피우고, 이웃과 어울려 하루 막걸리 두 차례 먹고 나면 하루가 간다. 행복하다. 이런 생활이 나는 좋다”고 강조한 정 씨는 “욕심은 한정 없다. 욕심을 버리면 다 부자 된다. 자녀들에게도 고생이 되더라도 극복하고 참고 살아야 하며 남들을 도와주려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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