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3일 오후 시간이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 다음주나 가급적 빨리 시골에 가자"라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당초에는 시골에 고사리 올라오는 시기에 맞춰서 5월 중순에 가기로 어머니와 말을 맞췄었다. 예상과는 달리 고사리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셨던 것이다. 더불어... 형이 두릅 수확시기를 맞추는데 일손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신 모양이다. 다급해지신 마음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일정을 부랴부랴 살폈다. 인천에서 순창에 갔다 오려면 적어도 2박 3일 정도 가야 되는데, 5월 초순까지 그렇게 되는 일정은 다음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만 가능했다. 일단, 어머니와 화요일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사실, 어머니는 시골에 머무르는 기간이 3일이면 짧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목요일에 먼저 올라오고 어머니는 더 계시다가 나중에 오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돌아 오시는 날에 시간을 맞춰서 강남터미널로 마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정을 잡았다.

여행 첫째날 화요일 아침이다. 오전 9시에 주안역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이번에는 짐을 그렇게 많이 가져오시지 않으셨다. 식재료, 과일, 간식 등 내가 다 준비해 갈테니까.... 몸만 오시면 된다고 사전에 당부를 드렸는데 효과가 있었다. 작년에는 식재료를 엄청나게 많이 가져와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부터 말씀을 드렸었다. 사실, 4월에 시골에 가면 먹을 수 있는 봄나물이 많다. 초고추장, 김치 등 몇가지만 가져가도 찬거리가 풍성하다. 나는 순창에서 시장을 보지 않기 위해 집에 있는 과일 등을 캐리어에 넣었다. 주안역에서 전철을 이용하여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이동했고, 10시 30분 출발하는 순창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예정시간보다 다소 늦은 14시 20분경에 순창터미널에 도착했다. 형이 미리 마중 나와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속버스휴게소에서 간식을 먹었지만, 식사로는 약간 부족했다. 순대국을 먹기 위해 시장통쪽으로 갔다. 순창에서만 먹을 수 있는 피순대국은 변함없이 맛있었다.

시골집(인계면 장례마을)에 도착해서 신속히 짐을 풀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쉬시고, 형과 나는 3월에 심었던 밤나무, 배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등의 관리를 위해 옥정호 인근의 밭에 갔다. 밭일을 마무리하고 옥정호가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여 간식으로 가져간 초콜릿을 형과 나눠 먹었다. 노을이 내리는 옥정호의 아름다운 풍경은 쌓였던 피로를 녹여주었다. 옥정호에 취해 있을 때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저녁밥 먹으러 언제 올거야?" 전화를 끈고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오는 길에 지질제(안정리에서 통안넘어 가는 제) 인근의 용출수가 있다고 하여 물맛을 보았다. 위생검사도 통과되었고, 물맛도 좋아 시골에 머무르는 동안 마시기 위해  20리터 1통을 받아왔다.

어머니, 외삼촌, 형과 나.... 넷이서 식사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봄나물의 왕인 데친 두릅과 엄나무순이 놓였다. 두릅을 먹었다. 아삭한 식감으로 시작하여 입안 가득한 향이 몸 속으로 들어올 때 내 몸이 봄기운으로 충전되는듯 하였다. 오랫만의 만남에 막걸리가 빠질 수 없었다.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은 깊어 갔다.

둘째날, 수요일이다. 새벽에 5시에 일어났다. 형이 몇년 전에 심어서 제법 자란 엄나무순을 수확하기 위해 어머니와 셋이서 엄나무밭에 갔다. 나와 형은 엄나무순을 채취했고, 어머니는 경사진 밭에서 다니시는 것이 위험해서 평평한 길에서 운동을 하셨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엄나무순을 전지가위로 자르는 맛이 좋았다. 새벽에 일을 하다 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때... 새벽에 일어나 이슬을 맞으며 뽕을 따 놓고 학교갔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지는 못해도 아들 형제가 사이좋게 함께 일하는 모습만 봐도 뿌듯하신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수확할 양이 많지 않아서 30여분만에 끝났다. 우리는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형은 출근했다.

오전에는 조부모님 묘소 관리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묘소에는 잔디가 아닌 쑥 등 잡풀이 있다. 묘소가 있는 독족굴로 어머니와 함께 갔다. 형이 평소에 관리를 잘 해서 그런지 묘소는 대체적으로 보기가 좋았다. 작업을 마치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어머니께서 인근에 있는 큰외삼촌 묘소에 들러서 집에 가자고 하셨다. 탑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때 이용했던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산길을 이용하여 삼촌 묘소로 걸어갔다. 그 곳도 잘 관리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앉아서 쉬시며 어머니 형제들끼리의 갈등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토로하시며 속상해 하셨다. 나는 짧게 호응하며 주로 듣기만 했다. 내가 어머니와 여행하거나 함께 있으면 말씀을 들어 드리는게 주요한 역할이다. 그렇게 한 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터벅 터벅 걸으며 집으로 돌아 왔다. 오는 길에 마주친 나무와 산과 들판은 추억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언제 보아도 포근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집에 도착하니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될 시간이었다. 점심식사는 내가 준비할테니 어머니는 편히 쉬시다 드시기만 하셔라고 말씀드렸다. 아침에 정리하고 남은 엄나무순과 두릅을 손질하였다. 눈으로 보기에는 녹색 빛을 잃지 않고, 식감은 아삭하며 향을 잃지 않도록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테라스의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후식으로 천혜향과 토마토도 준비했다. 아랫집에 사시는 형님네 부부가 오셔서 함께 먹었다. 내가 온전히 준비해서 어머니께 점심식사를 차려 드렸다. 어머니가 만족해 하시면서 함께 식사하는 아랫집 형님과 형수님에게 아들 자랑을 늘어 놓으셨다. 맛있는 봄나물과 함께하는 정다운 대화가 식사시간을 즐겁게 해주었다.

오후에 어머니께서는 삼촌네 집 근처로 고사리를 꺽으러 가셨다. 나는 집에서 쉬면서 강의준비 등을 했다. 집에 돌아 오신 어머니는 내일 내가 인천에 갈 때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초에 시골에 오시려고 했을 때는 더 계시면서 형의 일도 도와주고, 고사리도 꺽으려고 하셨다. 막상 시골에 와 보니  형이 일하는데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무릅이 불편하여 고사리를 꺽기도 힘들다는 것을 느끼신 것이다. 그래서 시골에 더 머무르는 것 보다는 내가 올라 갈 때 함께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하신듯 하다.

나는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왜냐하면, 내일은 점심시간에 완주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고, 모임이 끝나면 인천에서 온 친구의 차를 타고 바로 인천으로 올라가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되므로 완주에서 순창에 왔다가 인천으로 가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구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였더니, 흥쾌히 응해줘서 우리 일정을 변경하여 순창에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으로 가기로 했다.

저녁식사는 형과 형수가 외식을 하자고 하여 읍내 식당에서 먹었다. 식사 후에 까페에서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 왔다. 새벽부터 움직여서인지 몸이 피곤하였다. 눕자 마자 골아 떨어졌다.

셋째날, 여행 마지막날이다.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형과 함께 엄나무순을 채취하러 갔다. 수확할 게 많을 거라 기대하고 갔는데, 예상보다 적어서 작업이 일찍 끝났다. 오늘은 완주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해서 전주로 가야 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형이 읍내로 나오는 시간에 나도 함께 나왔다. 전주를 거쳐 완주로 갔다. 친구들을 완주에서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다 보니 4시가 넘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어머니를 모시러 순창에 도착하니 5시가 조금 넘었다. 친구 차에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했다. 인천에는 저녁 9시 30분경에 도착하였다. 집앞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기다리고 계셨다. 2022년 봄날 어머니와의 시골여행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어머니와 둘만의 고향여행은 매년 1~2회씩 하고 있다. 해가 거듭 할수록 어머니의 체력과 기력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시골에서 어머니의 활동량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여행을 앞당겨 가자고 전화하셨을 때만 해도 목소리에 힘찬 기운이 느껴졌었다. 시골에서 형이 하는 일에 도움도 줄 수 없고, 고사리를 꺽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천에 올라 가야겠다고 말씀하실때는 기운이 없게 느껴졌다. 올해 들어 입맛도 없으시다고 하셔서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된다. 앞으로 언제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여행을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늘 기대하며 기다린다. "아들! 우리 시골 가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PS. 이제는 "아들! 우리 시골 가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어머니 우리 6월초에 시골 가시게요'라고 먼저 말씀드리렸다. 6월초에 함께 시골에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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