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섭 (꿈매니저, 글밭일꾼)

염우구박인문학교실 블로그 운영자

 

오늘 아침에도 교복 차림으로 사등이 재를 넘어가는 JS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반항기 가득한 아들을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쇠죽(소에게 끓여주는 여물) 끓이는 일이 큰 고역이었다. 쇠죽 쑤는 일이 힘든 일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JS는 약속이나 한 듯 꼭 그 시간에 재를 넘어갔다. 남녀가 나란히 중학교에 가는 모습은 소년에게는 매우 부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마치 눈엣가시처럼 불편하기도 했다.

 

그날도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해야 했다. 햇볕 속에서 두둑과 고랑을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소년은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으니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소년은 에라, 모르겠다고 하더니 나무 그늘로 들어가서 누워버렸다. 어머니는 소년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한마디 나무람도 없이 혼자 땅을 컥컥 파댔다. 어머니 마음속에는 화가 보글보글 찌개 끓듯 들끓었다. 소년의 반항과 슬픔이 온전히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공부하고 싶은 아들을 가르치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소년은 어머니에게 미안한 미음은커녕 오히려 원망만 늘어났다. 한나절 일을 마치고 소년은 고삐에 꿴 송아지처럼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도 소태맛이었다.

 

어머니는 오후에는 깔()이나 한 망태 베어 오라고 한다. 소년은 대꾸도 없이 망태를 걸머지고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 아침에 JS가 넘어갔던 사등이 재를 넘었다. 오월이어서 산과 들은 신록이 싱그러웠다. 싱그러운 초록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그런 느낌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소리 굴을 지나 멀리 초등학교가 보이는 묏등으로 올라갔다. 묏등 상석을 제 안방인 양 차지하고 앉으니 온갖 상념이 오고 갔다.

 

소년은 일 년 더 있다가 학교 가라던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고 혼자 초등학교로 가서 선생님에게 졸라대서 동갑내기들보다 한 해 먼저 입학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냇가에서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다가 그게 맛있다고 구운 개구리 뒷다리를 보이면서 자랑했는데, 이를 뒷집 점이가 보고 말았다.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하면 소년은 그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악동이었다. 그러나 이 일도 뒷집 점이가 내뱉은 한마디로 그만두어야 했다.

 

애들아, 왜 제가 저렇게 뚱뚱한지 아냐?”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고 저렇게 뚱뚱한 거야!”

이 말에 여학생들은 배꼽을 잡고 자지러졌다. 그날 이후로 소년은 여학생들 가까이에는 얼씬도 못했다. 여기저기서 개구리 먹어서 뚱뚱한 놈이라는 조롱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상석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깔을 베려면 골짜기로 내려가야 했지만, 소년은 고갯마루 쪽으로 갔다. 그 고개에 이르자 오늘 아침 JS가 그 고개를 넘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소년은 다복솔을 베기 시작했다. 소년의 광적인 낫질 앞에서 소나무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패잔병처럼 쓰러진 소나무들을 JS가 돌아올 그 고갯길에다 차곡차곡 쌓았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쌓아 올렸다. JS가 이 소나무들을 보고 당황할 것을 생각하니 고소했다. 그들은 소나무들을 다 치우고 고개를 넘거나 아니면 옆으로 우회하여 가파른 비탈을 헤집고 와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어떤 놈이 생각하면서 그 소나무를 치웠을 것이다.

 

훗날 소년은 이 생각이 날 때마다 JS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철부지 같은 장난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힘이 저절로 빠졌다. 당시 소년에게 JS가 부러움의 대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할 이유는 없었다. 소년이 제때 학교에 못 간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그저 부러움과 시기심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이듬해 소년은 그들의 후배가 되어 함께 그 길을 다녔지만, 소년은 오래도록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어느 날 이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소년은 많이 자책했다. 언젠가 마을 상가에서 J에게 그런 일을 물었지만, 알지 못한다고 하길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은 아파한 사람만 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소년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이었지만, 당시 JS에게는 별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소나마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소년의 사과를 받아줄 J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친구야, 다복솔로 길 막은 것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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