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더디 오는 복흥에 성큼 여름이 왔다. 소리도 없이 열매는 탐스럽게 붉어졌다. 밤새 비가 내린 뒤 길가로 새끼 개구리들이 출몰하는 느닷없는 계절이다. 계절은 짙어진 잎에서 뻐꾸기의 울음소리에서 눅눅해진 대기와 해가 남아있는 동안 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농부들의 부지런함에서도 느껴진다. 매일 보는 달력에 표기된 유월이란 기호를 보고도 의식하지 못하다가 문득 만나는 여름이란 계절. 여름은 한해의 절반을 지나는 길목에 있다 보니 한 해의 절반을 지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 돌아보기 좋은 계절이기도 한 것 같다. 곧 우기가 들이닥칠 테니, 장마와 홍수를 대비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점검해 보는 거다.

도서관 운영을 맡게 되면서 복흥에 머무는 시간이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내가 거주하는 마을에 더 오래도록 머물 수 있다는 건 마을에 충분히 마음을 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임을 실감한다. 도서관을 알리고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명사들을 초청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로 상반기가 훌쩍 지나갔다. 도서관만큼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편안함에 더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다행히 복흥면민들은 문화에 대한 목마름과 관심이 깊은 탓에 프로그램과 강연이 안정적이고 때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리 좋은 강연과 프로그램이 있다 한들 면민들의 관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니 면민들의 요구와 관심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혼자만의 귀로는 한계가 있기에 여러 귀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담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지 않을까.

다행히 복흥면에는 교육공동체가 결성되어 각자도생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학교와 여러 기관의 장들이 모여 지역의 요구와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모임이다. 이에 더해 마을의 기관들이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있어, 이제 막 시작하는 도서관으로서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학생들과 관련된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일정을 조율하는 일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학생들을 위한 복지, 학부모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안, 다문화 가정의 지역 참여와 관련된 실질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는 일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일들에 대해 누군가 앞장서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 이런 자발성은 공동체와 더불어 개인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토대이다. 이렇다 할 성과를 당장 내놓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위해 모임이 결성되고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쓰는 것 자체가 이미 경쟁력을 갖춘 것이다.

어느새 봄에 심은 배추의 속이 꽉 들어찼다. 밭 두둑에 아무렇게 뿌려 놓은 완두콩도 수매를 마쳤다. 터를 닦고 알알이 심어 놓은 희망들은 느닷없이 다가온 여름처럼 소리도 없이 단단히 속을 채우거나 탐스럽게 붉어지기 마련이다.

 
저작권자 © 남원순창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