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고양이들이 우루루 달려온다. 몸을 비비며 밥 달라고 아이들처럼 냐옹 냐옹 귀여운 목소리로 밥달라고 보챈다. 정작 밥을 주려면, 고양이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내 앞에서 난리를 치니 걸어 앞으로 나가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시아버지가 길고양이들에게 때때로 음식을 주고 계셨던 것이 시작이었는데 우리 집은 시골집이라 마당이 넓고 집 옆에는 산도 있고 들판도 있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들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넓은 작업장도 있으니 최적의 환경일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예 고양이 가족이 우리 집 마당에 터를 잡아 벌써 20년 넘게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그래서 남은 음식이 있을 때만 주다가 결국 사료까지 사다가 키우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고양이들이 왔다가 갔지만 그 속에서도 내가 잊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그녀석은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얀 다리와, 와이샤츠를 입은 것처럼 하얀 목덜미를 가지고 있었고 정장을 입은 것처럼 까만 모습이었다. 큰아들이 외국에서는 이런 고양이를 턱시도라고 부른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턱시도라 불렀다.

턱시도는 아주 영리하면서도 다정했다. 고양이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냥도 잘했고, 많은 고양이들이 배고플 때만 냐옹거리는 것과 달리 턱시도는 언제나 편하게 다가와 몸을 부뵤대었다. 그런 턱시도와 추억이 참 많다. 그 녀석과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개냥이라는 말이 있지만 동네 사람들이 , 너는 개냐? 고양이냐?”라고 하며 웃을 정도로 턱시도는 정말 잘 따르던 녀석이었다.

내가 방과후 수업을 위해 버스를 타러 집을 나설 때면 보디가드처럼 앞장서 정류장까지 따라와선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나서도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어찌 알았는지 내가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마중 나와 냥~(“어서 와 수고 했어.”) 라고 말하면서 집까지 따라왔다.

여러 고양이가 있었지만, 유독 턱시도만 필자에 다정하게 굴었다. 볼 때마다 다정하게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면 벌렁 누어서 쓰다듬어 달라했었다. “아이고 예쁜 턱시도, 사랑해~ ” 시간이 날 때마다 턱시도를 쓰다듬어주는 게 일상이었다.

 

흔히들 고양이의 1년을 사람들의 7년에 해당된다고 말하지만. 해를 거듭할 때마다 늙어가는 턱시도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헤어져야 될 때가 올 거라 마음 준비는 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죽을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별은 예상치 못한 일로 갑자기 찾아왔다. 턱시도가 누군가가 설치한 덫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쪽 다리가 잘린 모습으로 힘겹게 나타난 턱시도. 하필이면 제일 사랑하는 턱시도에게 이런 일 생기다니......필자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런 모습으로 왔는데 필자는 눈물만 나오고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맛있는 고기를 줘도 먹지는 않고 물만 마셨다가 아예 물도 안 마시게 되었다.

남편이 수의사 선생님과 상의를 했더니 나이도 많고 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고통스럽게 보터게 하는 것보다 안락사를 시키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안락사에 대해 처음에 반대를 했지만 턱시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은 안락사를 시키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수의사 선생님이 보통 조용히 사라지는데 그 힘든 몸으로 죽을 힘을 다해 찾아와 마지막을 맞이하는 걸 보니 가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나보다고 이야기하셨다한다.

턱시도는 자기가 노닐고 내가 버스타고 내리던 모습을 지켜보던 정류장 가는 길 오솔길 옆 소나무 밑에 영원히 잠이 들었다. 필자는 턱시도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와 한 동안 토끼눈으로 지냈다. 턱시도처럼 영리하고 다정한 녀석은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예전에 동물농장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어떤 할머니가 사랑했던 개가 죽고 나서 넘 힘들어서 개보다 수명이 긴 거위를 키우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 말에 정말 동의를 한다. 턱시도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다시는 고양이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을 주면 헤어질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한 동안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되 사랑을 주지 않겠노라고 눈길도 안주고 버티었는데 웬걸 남아있는 녀석들도 턱시도의 후손들이 아닌가...... 아침에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으면 등에 올라타는 녀석이 있지 않나, 빨래를 널고 있으면 다리에 자기의 등을 비비는 녀석들.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이 녀석들을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턱시도가 스쳐 지나간다. 그와의 추억은 내게 슬프면서도 따뜻하게 해준다. ‘그래. 언젠가 이별이 있겠지만 지금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정든 이와의 이별은 힘들다. 그러나 이별이 있기에 만남의 순간과 귀한 인연이 더욱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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