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섭(꿈매니저, 글밭일꾼)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순창군민체육대회가 아주 성대하게 열렸다. 순창제일고등학교(당시 순창농림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배구, 농구를 비롯한 다양한 경기가 펼쳐졌고, 각 읍면을 대표한 선수들은 자기 고향의 명예를 걸고 온 힘을 기울였다. 많은 군민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어 목이 터지라고 응원했다.

 

1974815일이니,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나는 구림에서 나고 자랐으며 중학교도 구림에서 졸업했다. 구림 촌놈이 순창읍으로 자취생활을 한 지가 겨우 6개월쯤 지날 무렵이다. 당시 내 고향 구림면 사람들에게는 배구 우승이 기대되는 종목이었다. 구림의 배구팀에는 배구 선수 출신이었던 친구네 형님이 맹활약했고, 우리 마을의 대학 농구 선수 출신 형님 또한 대단한 선수였다. 두 분이 만들어내는 콤비 플레이는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순창 군민이 온통 배구장으로 다 모인 것 같았다.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를 보기 위하여 깨금발을 딛고 목을 뺀 채 지켜보았다. 음료수 가판대를 설치한 차량이 저만큼 비켜 서 있으면 사람들은 그 짐칸에 올라서 구경했다.

 

나도 가까이에서 관전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멀찍이서 구림 배구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경기에 집중하면서 응원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그 짐차에서 뛰어 내리면서 내 발을 그만 밟고 내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서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슬금슬금 물러서는 그 친구가 한없이 얄미웠다. 나는 속으로 뭐 이런 놈이 있느냐며 그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그리고는 힐난조로 그에게 한마디 쏘아댔다.

 

, 다른 사람 발을 밟았으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해야 하는 것 아냐?”

 

그러자 나를 밟고 내린 그 친구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웬 시비냐는 투로 대거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막 나가는 친구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이미 상황은 크게 어긋나고 말았다. 짐차에서 뛰어내리기는 그 친구 혼자였는데, 순식간에 그의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와 나를 에워싸고 만 것이다. 그리고 거친 말을 쏟아내며 나를 희롱하였다.

 

, 새끼야! 너 어디 살아? 인마 보이는 것이 없어?”

 

나보다 키도 작고 체구도 작은 친구는 순식간에 영웅이라도 된 듯, 함부로 욕을 하며 힐난했다. 그의 주변에 모인 패거리들은 금방이라도 나에게 주먹질이나 발길질이라도 하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면서 나를 한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구경하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나는 순간 절해고도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발을 밟고 내린 그 한 놈이라면 한 번 부딪혀 보기라도 하겠지만, 여러 명이 몰려든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순창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읍내 깡패들이 나에게 10원만 빌려달라며 시비를 건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언제 갚을 거냐며 그들을 힐난한 적이 있었다. 내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그 친구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있는데 나를 영사기 뒤로 불러내서 당황한 일이 있었다. 그날도 한 여학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호되게 수모를 당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때는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저 난감했다. 1개 분대쯤의 무리가 나를 에워쌌고, 나는 그들이 가자고 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일고등학교 설립자의 묘가 있는 곳이라는 것은 그 뒤에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끌고 가서 어떻게 할지 두려웠다. 집단폭행을 할지, 아니면 툭툭 건드리며 모멸감을 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에 바짝 겁을 먹고 엉거주춤 서 있는데, 저쪽 묘 근처에서 누구 하나가 이쪽으로 천천히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끌고 온 패거리들도 그를 주목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가 내 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더니 그만 자리에 멈춰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송일섭이가 여기 어떤 일이야?”

 

그 순간, 나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그저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학교 선배로 얼굴만 알고 지냈을 뿐, 언제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나는 그 선배를 알고 있었지만, 그 선배가 나를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 순간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선배는 분명하게 내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나를 끌고 온 패거리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선배는 그 패거리들과 나를 향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후배야. , 서로 인사하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

 

그렇게 해서 그날의 아찔했던 순간이 마무리되었다. 만약 그 선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날 적지 않은 수모를 당했을 것이다. 집단폭행을 당해서 팔다리가 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야무지게 대꾸하던 키 작고 체구 작은 친구가 나에게 사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은 마치 물에 빠진 생쥐처럼 꼴이 아니었지만, 그날 그 선배 덕에 수모를 당하지 않은 것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 선배를 거기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진다.

 

물론, 그날 이후 나는 읍내에서 구림 촌놈이라는 딱지를 완전히 뗀 셈이었다. 그때 나를 끌고 간 친구들이 시내에서 만나면 오히려 더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나이 들어 고향 생각을 하다 보니 별생각이 다 떠오른다. 그날 나와 함께 맞닥뜨렸던 친구들이 그립다. 내 고향 순창, 때로는 텃세가 아주 센 곳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순창 사람들은 정이 참 많다. 어디서 만나든 통성명을 하고 나면 그냥 형님 동생 하며 스스럼없이 지낸다.

 

아스라한 추억 속의 한 페이지, 그때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그때의 친구들 지금은 모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얼마 전에 하마터면 큰 수모를 당했을지도 모를 그 순간에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K 선배와 통화하였다. 전화가 넘어 건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날의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저작권자 © 남원순창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